[김현주기자] 도시바가 SK하이닉스에 1조원대 손해배상 및 일부제품의 판매금지 소송을 제기한 것은 기업간 소송에 그칠 단순 사안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 기업의 독보적 성장에 위기 의식을 느낀 일본 산업계, 정부가 기술 유출 방지에 대한 강경 대응에 나선 신호탄이라는 해석이다. 아울러 경쟁사의 발목잡기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실제로 단순히 두 업체가 화해, 협상해서 일단락될 사안이 아니라는 정황이 여러 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따라서 향후 SK하이닉스와 도시바, SK하이닉스와 샌디스크간 법정 공방은 지루하고 치열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분주했던 13일, 체포부터 소송까지 '속전속결'
지난 13일, 일본 요미우리 신문은 도시바의 낸드플래시 기술이 SK하이닉스로 유출됐다는 의혹에 대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고 특종 보도했다.
보도가 나간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일본 경찰은 지난 2011년 SK하이닉스를 퇴사한 것으로 알려진 스기타 요시타카(52세)씨를 체포했다.
국가 간 특허 침해 문제로 분쟁 및 소송이 일어나는 것은 흔하지만 이를 유출한 자를 즉시 체포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일본 경찰은 스기타씨가 2008년까지 샌디스크 직원이었으며, 일본 중부에 위치한 도시바의 요카 이치 공장에서 근무했다고 전했다. 샌디스크와 도시바는 15년 가까이 플래시 메모리 관련 공동연구를 추진하고 있는 긴밀한 관계다.
일본 경찰은 스기타씨가 2007년 4월부터 2008년 5월 사이 복사한 낸드플래시 관련 연구 데이터를 SK하이닉스에 이직한 때인 지난 2008년 7월경 넘겨줬다고 주장했다. 스기타씨는 현재 경찰에 구금돼있는 상태이며, 변호사를 선임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같은 날 오후, 일본 도시바는 도쿄지방법원을 통해 SK하이닉스와 스기타씨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도시바 대변인은 "자사의 지적재산을 보호하고 그 손실을 방지하기 위한 보다 강력한 시스템을 구축할 것"라고 강조했다.
도시바가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정확한 금액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략적으로 1천억엔(약 1조498억원) 수준으로 전해지고 있다.
같은 날 샌디스크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 법원을 통해 SK하이닉스에 손해배상 및 일부제품의 판매금지 소송을 제기했다고 발표했다.
샌디스크의 쥬디 브루너 부사장(CFO)은 "우리는 지적재산권의 가치를 믿고 영업 비밀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이번 소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트너(도시바)뿐 아니라 당국과 열심히 노력할 것이며, 할 수 있는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강경대응을 선언했다.
이같은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SK하이닉스는 14일 "일본 도시바가 부정경쟁방지법에 의한 손해배상 등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도쿄 지방법원에 제기했다"며 "하지만 현재 소장을 송달받기 전이며, 추후 소장이 송달되는 시점에 재공시 여부를 검토할 예정"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이 시간 현재까지 SK하이닉스는 소장을 송달받지 못했으며, 이와 관련된 대응 등 회사 공식 입장도 결정하지 못한 상태.
21일 주주총회장에서 박성욱 SK하이닉스 사장은 "아직 소장을 받지 못했다"며 "사실관계를 아직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언급은 어렵다"고 말을 아꼈다.
◆도시바-샌디스크, 미리 치밀하게 소송 준비했나?
국내 업계에서는 체포부터 소송까지 하루만에 진행된 이번 일에 대해 도시바가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일본 경찰이 스기타씨를 체포하기 전 현지 신문이 관련 사건에 대해 보도했다는 점, 당일 즉시 도시바가 소송 제기를 발표했다는 점 등이 석연치 않다는 것. 경찰 조사뿐 아니라 언론 보도, 소송 제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모두 준비된 각본에 따라 진행된게 아니냐는 얘기다.
도시바는 "이번 소송이 SK하이닉스와 공동으로 추진하는 차세대 메모리 장치의 개발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긋기는 했다. 한편으론 협력을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소송을 진행하는 등 즉, 별개의 문제로 다루겠다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해 박성욱 SK하이닉스 사장 역시 "도시바와는 시작부터 양사 이익을 위해 협력했고, 지금도 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소송과 무관하게 협력을 이어갈 뜻을 밝혔다.
이는 큰 틀에서는 사업 협력 진행 사항은 변동이 없을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다만 도시바의 실제 의도와 진위가 무엇인지에 따라 양사 관계의 변화 가능성은 열어둔 것으로 풀이된다. 소송 경과에 따라 양사의 협력 구도가 어떻게 변할지 관심이 집중되는 대목이다.
◆일본, 자국 기술 보호 강화 조짐…여파 상당할 듯
한편에서는 일본 기업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기술 유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이는 일본을 제치고 우리나라 기업이 반도체 시장에서 독보적으로 성장한 것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 것.
일본 신문들은 자국 기업들의 강력한 경쟁자로 한국, 중국 기업들이 등장한 2000년 이후 자국 기술의 유출이 더욱 빈번해지고 있다면서 위기 의식을 강조하고 나서기도 했다. 이 같은 일본 사회의 위기 의식은 강력한 처벌과 관련 법 개정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사히 신문 등에 따르면 일본에서 기업 비밀을 유출한 자를 체포하는 데 요구되는 근거를 완화하는 법은 지난 2009년 개정됐다.
스기타씨는 이 법률이 개정되기 전 연구 데이터를 훔친 것으로 알려져 체포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논란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경찰 당국은 스키타씨가 유출한 연구 자료는 해당 법의 적용을 허용할 만큼 충분히 중대한 사안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력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정부 차원에서는 관련 법률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국제 경쟁력을 좌우하는 자국 기술이 해외로 빠져나지 않게 하기 위해 유출자에 대해 처벌을 강화한다는 게 골자다.
일본의 현행 부정경쟁방지법은 영업비밀을 유출한 기업에 대한 벌금이 미국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수준인 최고 3억엔이다. 개인이 기밀을 유출했을 때 벌금도 최고 1천만엔으로 상한선이 없는 선진국에 비해 약한 수준이다.
니혼게이자이 등 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이같은 법률 제정 논의에 착수했으며 내년 정기국회에 법률안을 제출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 일본의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일본의 첨단 기술 보호 및 유출 방지가 매우 중요하다"며 "정부는 이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뿐 아니라 정부와 경찰이 적극 나선 것을 미뤄볼 때, SK하이닉스와 도시바간 소송은 그리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단 소송 내용만으로도 법정 공방이 장기화될 가능성은 높다.
한국투자증권 서원석 애널리스트는 "기술의 불법 취득 및 SK하이닉스가 해당 기술을 적용하고 수익을 낸 점 등에 대한 입증 책임은 도시바와 샌디스크 측에 있기 때문"이라고 이를 설명했다. 이 때문에 법정 공방은 지루하고 치열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아이서플라이가 집계한 지난해 세계 반도체 업체 순위는 1위 인텔, 2위 삼성전자, 3위 퀄컴, 4위 마이크론, 5위 SK하이닉스, 6위 도시바 순이다.
낸드플래시 기준으로 봤을 때 삼성전자가 1위, 도시바가 2위를 차지했으며 마이크론과 SK하이닉스가 각각 3, 4위를 이었다. D램의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2개 업체가 세계 시장의 3분의2를 점유하고 있다.
김현주기자 hannie@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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