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권 붕괴 이후 용도폐기됐던 007을 다시 불러낸 것은 미디어 재벌이었다. 지난 1997년 개봉된 007 시리즈 18탄 '네버다이'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미디어 재벌을 대항마로 내세웠다. 잘 아는 것처럼 '네버다이'에 나오는 미디어 재벌의 모델은 루퍼트 머독이다.
최근 들어 그는 "구글은 기생충"이란 말을 자주 되풀이하고 있다. 대가 없이 남의 기사를 가져다가 돈을 벌고 있다는 게 그 이유다. 머독은 한 발 더 나가 아예 구글에서 자사 기사들이 검색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머독도 노림수가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영국의 가디언은 "머독 회장이 구글에서 철수한 뒤 검색 결과를 판매하는 사업모델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그 파트너로 '빙' 키우기에 공을 들이고 있는 MS를 낙점했다는 것이다.
MS와 머독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질 경우 "돈을 받고 한 쪽에서만 검색되도록 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머독은 왜 이토록 구글을 미워하는 걸까? 기자는 검색 수익은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구글이 뉴스 산업의 기본 패러다임을 뒤흔들 것이란 위기의식이 더 강하게 작용한 것 같다. 매체 브랜드를 무력하게 만드는 구글 같은 플랫폼이 더 부각되는 것이 불편했을 것이다.
머독의 최근 행보를 보면서 백화점 등장 초기 제조업체들의 절규를 떠올리게 됐다. 다소 비논리적인 연상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잠시 그 얘기를 해보자.
원래 백화점은 모든 물건을 취급하는 점포였다. '百貨'라는 말 그대로 다양한 것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러니 고객들의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생산업체들에게 편리한 존재였다. 이 곳 저 곳에 판매망을 깔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생산업체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백화점은 단기간에 상품 거래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백화점은 '물건들이 집결된 장소'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됐다. 다양한 문화적인 코드가 추가되기 시작한 것이다. 고급 문화를 향유한다는 부가가치까지 덧붙게 됐다. 이와 함께 백화점들이 권력을 갖게 됐다.
그 반대급부로 제조업체들의 브랜드는 조금씩 약해졌다. "A백화점에서 샀다"는 문화코드가 "B업체 옷을 샀다"는 경제 코드를 누르기 시작했다. 아예 백화점에 납품한다는 사실이 후광 효과를 얹어주기도 했다.
머독이 구글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싸움도 비슷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뉴스 패러다임이 생산에서 유통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이런 위기는 머독에게만 닥친 것은 아니다. 상당수 미디어들, 특히 신문들은 거대한 패러다임 변화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그래도 머독 정도 되니까 대항할 생각이라도 하는 것이다.
기자 역시 최근 뉴스 시장의 변화를 두려움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뉴스 생산자에 속해 있으니, 당연하지 않겠는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뉴스산업에조차 생산보다 유통의 힘이 더 강해지는 현실에 자괴감을 느낄 적도 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머독의 방식엔 도저히 찬성표를 던질 수가 없다. 뉴스 시장의 중요한 한 축인 '독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 해서다. 게다가 소셜 미디어라는 시대 흐름을 거스르려는 그의 시도 역시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머독이 007과 싸우던 시절 미디어 시장은 소수 엘리트 중심구조였다. 하지만 12년 세월이 지난 지금은 더 이상 엘리트들이 시장을 주도하기 힘들게 됐다. 이런 흐름을 거스르기 위해 인위적으로 연결망을 끊는다는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생산과 유통은 바퀴의 두 축과 같은 존재다. 따라서 공존하면서 경쟁하는 모델을 찾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대화와 토론이 중시되는 뉴스에선 특히 그렇다.
그런 점에서 머독의 최근 행보는 국내 뉴스산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생산업체와 유통업체 모두에게 말이다.
김익현기자 sini@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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