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설재윤 기자] HL만도가 지난 21일 오후 판교 사옥으로 취재진을 긴급 소집하면서 내건 명분은 '사과'와 '대책'이었습니다.
지난 7월 평택공장에서 작업 중 숨진 20대 하청 노동자 고(故) 김승모 씨 사고와 관련해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7대 종합안전개선대책'을 내놓겠다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준비된 사과문은 읽히지 못했습니다.
현장에 나타난 사측 경영진은 회견장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한 채 발길을 돌렸습니다. 뒤늦게 기자회견 소식을 듣고 찾아온 유족과 전국금속노동조합 조합원들이 거세게 항의하면서 회견 자체가 무산됐기 때문입니다.
![21일 오후 경기 성남시 HL만도 판교 사옥에서 열린 ‘평택공장 사망 사고 관련 종합 안전 개선 대책 발표’ 기자회견장에서, 고(故) 김승모 군의 유족들이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설재윤 기자]](https://image.inews24.com/v1/24e20d193d435d.jpg)
사과를 하겠다는데 유족은 왜 기자회견을 막아섰을까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사과를 누구에게 먼저 했느냐'에 있었습니다.
이번 기자회견은 당사자인 유족에게 사전에 알려지지 않은 채 추진됐습니다. 당시 국회에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던 유족들은 뒤늦게 회견 소식을 접한 뒤 황급히 판교 사옥으로 달려왔습니다.
현장에 있던 노조 관계자들은 "수많은 산재 현장을 봤지만 유족과 사전 협의는 커녕 알리지도 않고 기자회견을 여는 경우는 처음 본다"고 비판했습니다.
HL만도가 이날 준비한 안전대책 자체는 구체적이었습니다.
최고경영진 직속 '안전보건실'을 신설하고 위험이 발견되면 기존 결재 절차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조치한 뒤 보고하는 '선(先)조치 후(後)보고' 시스템을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외부 전문기관을 통한 전수진단과 스마트 CCTV 도입 등도 포함됐습니다.
문제는 순서였습니다.
사고 발생 이후 62일 동안 장례까지 미루며 진상규명을 요구해온 유족보다 취재진에게 먼저 사과와 대책을 설명하려는 모양새가 됐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이날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HL만도 평택공장 산업안전 감독 결과에서는 본사와 하청업체에서 총 138건의 위반 사항이 적발됐습니다. 노동부는 이 가운데 86건을 사법처리하고 52건에 대해서는 총 2억80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기로 했습니다.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여부에 대한 수사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노조와 유족 측에서는 위험성이 높은 기계 수리 업무를 하청 노동자에게 맡겨온 구조를 두고 이른바 '위험의 외주화' 문제도 제기해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가 준비한 공식 사과는 정작 사과문을 읽어보지도 못한 채 끝났습니다.
![21일 오후 경기 성남시 HL만도 판교 사옥에서 열린 ‘평택공장 사망 사고 관련 종합 안전 개선 대책 발표’ 기자회견장에서, 고(故) 김승모 군의 유족들이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설재윤 기자]](https://image.inews24.com/v1/28261563e583cc.jpg)
그리고 상황은 그날 밤 달라졌습니다. 기자회견이 무산된 뒤 HL만도는 유족·노조 측과 협상에 들어갔고 밤샘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사고 발생 63일째인 22일 새벽 마침내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사측은 정몽원 회장이 유족을 직접 찾아 사과하고, 노조가 참여하는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유가족에 대한 배·보상 이행도 약속했습니다.
두 달 넘게 장례를 미뤄온 유족도 비로소 고인을 떠나보낼 수 있게 됐습니다. 전날 카메라 앞에서 하려던 사과가 멈춰선 뒤에야 회사와 유족이 마주 앉은 셈입니다.
물론 합의로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중대재해처벌법과 불법파견 관련 수사 및 형사 절차가 남아 있고, 무엇보다 회사가 내놓은 안전대책이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는지도 지켜봐야 합니다.
HL만도는 7개의 안전대책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기자회견 파행이 보여준 것은 어쩌면 그 목록에 적혀 있지 않은 가장 기본적인 한 가지였는지도 모릅니다.
사과문을 펼치기 전에, 먼저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과 마주 앉는 일이었습니다.
/설재윤 기자(jyseol@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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