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박지은 기자] 오는 6일은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에 진출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삼성전자는 그러나 별도의 기념 행사는 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삼성 반도체가 기록한 '세계 1등' 도전의 역사를 차분히 되새기겠다는 방침이다.
나이 50세를 일컬어 지천명(知天命)이라 한다. 하늘의 뜻을 깨닫는 나이가 됐다는 의미다. 사업 50주년도 그 의미가 이보다 작지는 않을 것이다. 크게 기념할만도 하지만 최근 삼성 반도체의 위기를 감안해 안으로 더 살펴보자는 의도로 해석된다.
1974년 이후 50년동안 매출 50만배 늘어나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의 역사는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1974년에 사재(私財)를 털어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하며 시작됐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은 그후 끝없는 '세계 최초' 기술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메모리 리더로 자리매김했다.
한국반도체 인수 직후 삼성 반도체 매출은 1975년에 2억원에 불과했지만, 1986년 1000억원을 돌파하고, 올해에는 사상 처음으로 연간 반도체 매출이 100조원을 넘길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50년만에 매출 규모만 무려 50만배나 늘어난 셈이다.
1993년부터는 30년 넘게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도전의 역사 속에서 중대한 변곡점들도 많았다. 무엇보다 △8인치에서 12인치로 웨이퍼 사이즈를 키웠던 일 △4M 이후 칩 개발 방식을 스택(Stack)으로 선택한 것 △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개척한 것 등이 중요한 결정으로 꼽힌다.
특히 플래시 메모리는 D램이 이룬 성취와 또 다른 면에서 의미가 깊다. D램은 반도체 불모지에서 선진 기술을 빠르게 흡수하며 성장하는 '추격자 전략'을 썼지만, 플래시 메모리는 삼성전자가 처음부터 독자적인 기술 개발에 몰두한 제품이다.
지금은 SK하이닉스, 마이크론테크놀로지도 모두 생산하는 '3D 적층형 V낸드 플래시'를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시장에 선보였던 것이다.
삼성전자 출신 한 반도체 전문가는 "미래 시장이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상황에서 10여 년이나 지속적으로 플래시 메모리 분야에 과감하게 투자했다"며 "이 선대회장이 당시 세계 최고였던 도시바가 제안한 낸드 플래시 메모리 합작 제안을 거절하고 '마이웨이'를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 대성공 사례가 됐다"고 설명했다.
기술 경쟁력 약화에 따른 복합적 위기에 직면
그러나 30년 넘게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 1위를 지켰던 삼성전자는 최근 복합적 위기에 직면하며 성장과 퇴보의 기로에 서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장의 대세가 된 고부가가치 고대역폭메모리(HBM) 분야에서는 경쟁사에 밀리고 있고, 전통적인 메모리 시장에서는 중국의 추격을 허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술 경쟁력이 약화됐고, 조직의 짜임새도 예전같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엇보다 HBM 분야 경쟁력 약화는 뼈 아프다. 2022년 11월 챗GPT 출시 이후 세계 반도체 시장은 급변했다. 고부가 제품이 바뀌었고, 공급 체계도 바뀌었다. 삼성이 메모리를 주도할 때와 달리 완전히 새로운 생태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인공지능(AI)을 발달시키는 반도체가 시장을 주도하게 됐고, 그 생태계의 정점을 차지한 곳은 미국의 엔비디아다. 글로벌 빅테크를 비롯해 인공지능에 투자하려는 대부분의 기업이 엔비디아의 AI 반도체를 받기 위해 줄을 섰기 때문이다.
엔비디아는 고객사에게 자사 AI반도체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결합해 공급한다. 이 결합 제조 작업은 주로 대만의 TSMC에서 담당한다. 엔비디아와 TSMC가 굳건한 동맹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생태계에 메모리 기업이 들어가야 하는 구조다.
삼성은 그러나 아직까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이 생태계에 제대로 편입되지 못한 상태다. 그 자리에 들어간 기업은 만년 메모리 2위로 평가받던 SK하이닉스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삼성전자가 뒤따라가야 하는 형국이 됐다.
파운드리와 범용 D램 상황도 녹록하지 않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사업에서 '2030 세계 1위'라는 야심찬 목표를 내세웠지만 세계 1위 대만 TSMC와 격차는 좁혀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사업이 쪼그라들고 적자가 커지면서 아예 파운드리를 접고 메모리에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을 정도다. 메모리와 파운드리의 사업 속성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또 중국산 범용 D램과 가격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는 점도 삼성의 숙제다. 이주완 인더스트리 애널리스트는 "범용 D램 가격 하락은 PC, 스마트폰 수요가 살아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면서도 "중국 업체들의 점유율 확대도 D램 가격 흐름의 주요 변수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외 환경도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특히 미국이 첨단기술 분야에서 중국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며 수출 통제의 범위를 계속 확대화고 있다는 점도 삼성의 앞날을 우려스럽게 하고 있다. 미국 상무부는 최근 한국산 HBM의 중국 수출을 통제하는 조치를 내렸다. 중국에 HBM을 판매해오던 삼성으로선 괴로운 일일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의 지원 조치도 안갯속에 빠져 있다. 미국 상무부는 TSMC, 인텔, 글로벌파운드리 등 주요 반도체 기업들과는 '반도체과학법'(CHIPS Act)에 따른 보조금 협상을 마쳤지만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는 협상이 길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대표이사가 메모리 직접 챙기며 쇄신 전략 내세워
반도체가 위기라는 것은 삼성전자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최근 단행된 2025년 임원인사와 조직개편의 핵심은 반도체 부활에 방점이 찍혀 있다.
무엇보다 올해 반도체 위기론이 확산되면서 구원투수로 등장한 전영현 부회장에게 연말 인사에서도 힘을 실어준 게 주목됐다. 대표이사를 맡기고, 반도체 전 영역을 관장하는 DS부문도 책임지게 했으며, 메모리 사업부의 경우 직접 진두지휘하도록 한 것이다. 기존 메모리사업부장과 파운드리사업부장에겐 책임을 물었다.
조직도 개편했다. AI에 더 집중하기 위해 DS부문에 인공지능(AI)센터를 새로 만들었다. DS부문의 최고정보책임자(CIO) 조직이었던 '혁신센터'를 A센터로 확대 개편하고 AI센터장은 송용호 메모리사업부 솔루션개발실장(부사장)에게 맡겼다. 메모리를 비롯한 반도체에 AI 기능을 더 향상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그러나 이번 인사와 조직 개편과 관련해 "삼성으로서는 내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삼성이 지금 처한 위기에 비한다면 인사와 조직에서 이번 쇄신책이 강력해보이진 않는다"고 평가했다.
그는 "현대차그룹이 트럼프 2기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에 밝은 외국인 CEO와 미국 관료 출신 사장을 영입함으로써 경영 전략을 뚜렷하게 부각시킨 것과 비교하면 삼성전자의 인사 및 조직개편은 위기에 비해 뭔가 밋밋하다는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어찌됐든 반도체 사업 50년 만에 성장과 퇴보의 기로엔 선 삼성전자의 무거운 짐이 전영현 대표 어깨 위에 올려졌고, 2025년에는 그 방향성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박지은 기자(qqji0516@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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